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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으로 가는 계단 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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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ing the Steps to Knowledge

2000년 4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녹음에 관하여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는 삶에서 근본적인 영적 집중과 연습과 적용으로, 앎길을 배우고 따르는 것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우선, 앎이 무엇인지, 그리고 앎이 당신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말해보겠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영적 마음,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 깊은 마음은 당신의 표면 마음인 개인적 마음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이 깊은 마음은 고찰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추정하거나 공상하지 않으며, 당신의 이성이 관여하는 대부분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깊은 마음은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다. 이 깊은 마음이 이곳에 있는 것은 세상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려고 여기 왔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당신이 삶에서 아마도 나중에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여, 어느 정도 독립하고 독자적 사고를 하는 때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처럼 당신이 독립적이 될 때, 우리가 앎이라 부르는 이 깊은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당신의 체험 속에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앎의 마음은 다른 마음과 같지 않다. 당신은 앎에 관해 끝없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성은 또 다른 이성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앎이 어떤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지만, 사실 당신의 추측은 여전히 당신의 이성에 기반을 두고 있을 것이며, 이성은 단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들, 그 자신의 이미지들만 투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앎의 깊은 마음이 이처럼 신비롭게 보인다. 앎은 정의할 수 없다. 당신은 앎이 표현된 것을 묘사해볼 수 있으며, 당신이 앎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어떤 것을 묘사해볼 수 있지만, 앎은 정말 대단히 신비롭다.

어떤 사람들은 “음,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 의식이야!” 또는 “이것은 불성이야!” 또는 “이것은 우주 마음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마음이 정말 어떤 것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등등 많은 추측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이성이 하는 추측이다. 추측은 내면에 있는 앎의 신비한 본질을 포괄할 수 없다. 또한, 앎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표현하는지, 왜 이곳에 왔으며, 무엇에 봉사하려고 이곳에 왔는지, 묘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신비로운 채로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당신은 오로지 앎 그 자체의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앎이 무엇인지, 앎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앎이 왜 당신 안에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앎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아주 일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앎에 대한 맥락을 주고, 앎이 정말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어쩌면 당신이 앎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나, 앎길의 연습과 공부에서 어떤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앎은 본질적으로 당신 안에 있는 신이다. 신은 당신에게 신의 의식의 일부를 주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은 당신의 이성과는 다르다. 이 의식은 끊임없이 생각하지도, 숙고하거나, 계획하거나, 기억하거나, 상상하지도 않는다.

이 의식은 실제로 자각의 마음 상태에 가깝다. 이것은 우주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신의 일부분인 당신의 작은 조각은 신과 당신의 연결부를 담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실제로 당신이 신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앎은 정말로 당신과 신의 연결부이다. 당신 마음의 이 깊은 부분은 당신과 신의 연결부이다. 이성을 통해서는 당신이 신과 연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신이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신과 당신의 환경이 창조하였다. 신이 창조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이 깊은 마음인, 당신 내면의 앎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앎은 신과 당신의 연결부이고, 당신이 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사명을 위해 세상에 온 당신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라.

다시 말해, 앎에는 창조주에 대한 기억,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한 기억, 삶에서 당신 사명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다. 실제로 당신이 이곳에 와서 성취해야 하는 큰 활동이 있다.

“아, 내 사명이 뭔지 알겠어. 이것을 하는 것이야. 저것을 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앎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밟아야 할 많은 단계 중 한두 단계를 알았는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사명은 단순한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 단계들을 밟는 데 매우 진보한 경우에만 “이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실질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처음부터, 자신의 사명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사명이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사명이 없다. 당신이 사명 안에 확고히 자리잡을 때까지, 또 그 사명을 규칙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그 사명이 당신의 삶과 활동, 당신의 관계와 이해 등을 안내할 때까지는, 당신은 사명이 없을 것이다.

앎은 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당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안다. 앎은 당신이 누구를 만나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안다. 그런데 앎은 동적이다. 단순히 상황을 사전에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은 세상의 움직임과 동적인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만약 바뀌기 마련인 상황이 바뀌면, 또 상황에 일련의 다른 행동이 요구되면, 앎은 즉시 반응한다. 그래서 미리 정해진 계획을 당신이 이미 가진 것과는 다르다. 앎은 당신 주변 삶의 변하는 환경에 끊임없이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고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황에 맞추어 나갈 수 없으므로,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규정하고, 또 삶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규정하고 나서, 그 규정에 자신의 경험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가는 것이다.

앎은 순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앎은 계획을 바꿀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당신이 가는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앎을 따르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규정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이고,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며, 이것이 내가 믿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신앙 체계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고, 삶이고, 목적이고, 사랑이다. 등등” 이런 많은 규정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든 규정에 얽매인 사람들은 삶과 함께 움직일 수 없다. 사람들은 미리 규정한 것에 따라 삶이 움직이도록 노력하지만, 삶과 함께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사상과 이념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므로 앎길을 배울 때, 당신은 현존하는 법을 배우고, 환경에 대응하는 법, 앎을 따르는 법을 배우며, 앎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법, 앎의 큰 인식과 큰 힘, 앎의 은혜를 얻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앎은 신과 당신의 관계이며, 당신 안에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그들 내면에 이 신비한 깊은 지성이 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앎이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앎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사실 잠재적인 것에 더 가깝다.

그래서 그들이 삶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인 고립감을 얼마나 깊이 느끼든, 또 얼마나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버림받았다고 느끼든, 그들은 여전히 신과 연결되어 있으며, 앎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은 신을 향해 가는 계단 즉, 당신 안에 있는 신,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을 향해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모든 면을 신과 같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신과 연결된 것으로 하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신이 당신 안에 창조한 것은 오직 앎뿐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분리 속에 살면서 당신이 혼자 창조했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아,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내 생각에는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모든 것을 정당화해야 하는데, 만약 당신이 주변 삶을 정말로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면, 그렇게 정당화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앎길을 배우는 것은 신의 길을 배우는 것과 같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은 신을 향해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다. 앎의 삶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 신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이 깊고, 강력한 지성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으며, 응답하지 않는다. 마치 이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들의 믿음과 사고, 사회적 조건화, 태도, 신념, 심지어 신에 대한 신앙까지, 이것들이 한 사람의 삶과 관점을 완전히 지배하여, 그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내면에 있는 앎의 큰 마음은 그들이 전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세력의 노예와 같다. 그들은 두려움의 노예이고, 욕망의 노예이며, 두려움과 욕망에서 태어난 자기 신념의 노예이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이런 경험이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전적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다. 고립이라는 개인적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 마음의 지배와 사회적 조건화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방식에서 자유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세상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내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외적 자유를 실제로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위 세상을 보라.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보라. 그들은 중독에 빠져 있고, 자신의 관계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며,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분명 당신은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다. 심지어 당신 자신 안에서도 당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안다. 자유는 단순히 삶에 아무런 의무도 없거나,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실제로 앎을 찾아 따르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당신은 마침내 자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그 일이 진정한 성실과 만족의 모든 원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더 많은 외적 자유를 얻으려고 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혼은 당신이 여기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을 때만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깊은 행복이고 진정한 행복이다. 물론 즐거운 순간들이 있고,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곳에서 당신이 큰 목적과 사명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데서 오는 만족과 성실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참여하려면, 앎만이 그 실체를 알고 있으므로, 앎을 찾아 따라야 한다.

영성과 영적 목적, 신과 당신의 연결이 의미하는 것, 영적 연습, 이 모든 것에 대한 끝없는 믿음과 추측이 있다. 하지만 오직 앎만이 안다. 만약 당신이 앎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이 아무리 열렬히 믿고, 또 당신의 영적 태도나 믿음에 따라 자신에 관한 생각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당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 수 있는 이런 자유가 없다면, 당신은 실제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이 자유가 우리에게 앎길을 배우게 한다. 앎길은 가르침이 하나뿐인가? 그렇지 않다. 앎길을 가르치는 가르침은 많다. 그 가르침들은 세상에서 여전히 소수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영적 가르침은 오직 믿음과 태도만을 가르치고, 긍정적인 생활이나 건설적인 생활 등을 위한 처방만을 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적 가르침들은 대부분 앎길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가르침들은 앎길을 아직 배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변명일 뿐이다.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항상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앎길은 가르침이 하나보다 더 많지만, 이 가르침들은 희귀하고, 앎길을 가르치는 진정한 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당신을 매력적이게 하거나 아름답고 빛나게 하는 가르침을 주거나, 고양된 체험이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등의 가르침을 주는 교사들이 아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육체적 또는 정서적 치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앎길을 준비하는 데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유익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영적 가르침은 믿음이나 태도, 행동에 주안점을 두므로, 그 가르침들이 앎길 그 자체인 경우는 드물다. 그 가르침들은 실제로 정곡을 찌르지 않으며, 진정한 행복과 일체성, 진실성이 존재하는 근원, 당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근원으로는 실제로 가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가르침의 수준도 다르므로, 그런 가르침도 괜찮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어느 시점에서 앎길을 배워야 하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여기에는 정당화도 없고, 변명도 없다는 점을 잊지 말라.

그러나 앎길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사건들에 대응하기 위해 특정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앎길은 정적인 가르침과는 다르다. 우리가 말했듯이, 앎은 이곳에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세상의 조건과 상황에 대응한다. 그래서 앎이 지혜롭고, 그래서 앎이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앎길의 가르침 역시 세상의 조건에 대응해야 한다. 그래서 창조주는 당신 삶을 형성하고 그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건들을 고려하여 가장 큰 충격을 주기 위해, 앎길을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제공한다.

앎길에서 그러한 새 계시가 최근에 큰 공동체 앎길이라는 가르침으로 제공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더 이상 우주에서, 심지어 지구 안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현실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가르침이다. 지금은 인류가 큰 공동체에 출현하는 것이 현실이며, 우주에 있는 삶의 현실을 배워야 하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영성의 의미를 배워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앎길을 배우는 새 계시이다. 변한 것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당신 삶에서 맥락은 변하기 때문이다. 당신 삶의 상황이 변하고 있다. 그래서 300년 전에 전해진 가르침은 더 이상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르침이 새로운 표현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예술과 문학이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큰 통찰력은 새로운 형태, 새로운 표현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영성의 현실에서 이 새로운 표현은 적어도 주기적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큰 공동체 삶과 인류의 큰 공동체 출현에 관한 앎길의 독특한 가르침이 이제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 가르침의 공부는 앎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성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과제인 앎길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다.

오직 진보하는 학생만이, “세상에! 이건 정말 크군!”이라며, 보기 시작한다. 오직 그들만이 실제로 모든 것이 앎과 앎의 부정, 앎의 무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 자신의 체험에서 직접 보고 인식하기 시작할 수 있으며, 당신이 보는 세상은 정말로 앎의 현실, 앎의 부정, 앎의 무지, 이 셋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상태에서는 앎만 있지만, 당신은 천국의 상태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앎의 부정과 앎의 무지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매우 강력한 힘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그저 조정하려고만 할 때, 일어나는 일은 결국 매우 부정직해지고, 자신의 경험 전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좋은 것, 행복한 것, 예쁜 것들만을 보고자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당신은 그 밖의 다른 현실을 모두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당신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응할 수 없으며, 실제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에 반응할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조종에 아주 쉽게 영향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고방식에 선호가 대단히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이것은 삶에서 진정한 확실성과 안정을 찾는 길이 아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며, 당신은 세상에서 매우 위험하고 어두운 세력들, 즉 무지의 세력, 조종과 통제의 세력들에 매우 취약하게 된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항상 이런 것들을 피하겠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항상 분명히 인식할 것이다.

이리함으로써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앎길을 배울 때, 당신은 근본적으로 정직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직시한다. 당신은 가식적으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글쎄, 난 삶의 이 부분만 경험할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할 거야.”라거나, “나는 오직 이런 감정만 표현하고, 저런 감정은 표현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안에 있는 이것들만 알고 다른 모든 것들을 알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정직하려면, 당신이 직면해야 할 어떤 것에도 기꺼이 맞서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할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이 믿음과 당신 고유의 힘에 대한 이 신뢰이다. 이런 인식이 없고, 앎과 이런 연결이 없다면, 당신은 너무 두려울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시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자신의 건강에 관한 것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부정의 상태에서 살 것이다. 이런 부정은 당신의 안녕과 행복에 대단히 파괴적이고, 성취와 행복과 성실성으로 당신 삶을 데려갈 중요한 것에 다가가지 못하게 한다. 그 중요한 것은 이곳에 온 당신의 큰 목적을 찾아 성취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앎은 안다. 그 목적은 어떻게 찾는가? 앎길을 배우고 따르는 것으로 찾는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영적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영적 연습은 자신과 삶에 대한 큰 것들을 배우는 데 필수적이다. 철학을 갖거나 가정을 하거나 책을 읽음으로써, 더 많은 관념과 가정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당신은 마음에서 앎으로 가는 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다리는 하루나 일주일, 한 달 안에 세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여기서 매우 큰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은 끈기와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것을 취미 삼아 해서는 안 된다. “음, 일주일 동안 해 보고, 어찌 되는지 보겠다.” 이런 큰 가르침에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그것을 배우거나 이해할 가망성은 전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자신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기계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고, 라디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지도 보는 법을 알아낼 수 있다. 이성이 판단하고 창조하고 이해하는 일을 아주 대단히 잘하는 매우 실용적인 어떤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당신 삶의 본질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당신 내면에 있는 창조주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것들이나, 복잡한 작업 계획 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당신 삶의 본질과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개념이 더욱더 난해해지고, 그 이론이 더욱더 복잡해지며, 이성이 헤아릴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어떤 모순을 다루려고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 당신은 이것을 보았다. 이성으로 창조주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사람들이 쓴 두꺼운 책들이 대단히 많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이성은 훌륭한 도구지만, 이 일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아니다. 여기서 당신은 내면에 있는 큰 자원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큰 공동체 앎길을 배우는 연습서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영적 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이리하려면 먼저 매일 연습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당신이 삶의 다른 부분들을 조정해야 하고 자신의 상황에 더 큰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계단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 어떠한 통제력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영적 연습을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통제력을 갖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씩 화장실에 가고, 아마도 매일 샤워를 하고, 매일 음식을 먹는다. 영적 연습은 왜 매일 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런 다른 것들이 중요하거나 심지어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므로, 그것들을 위해 시간을 낸다. 자신의 영적 연습을 중요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면, 당신은 연습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놓기 시작할 것이며, 이것은 필요하다.

이러한 일관된 적용은 배움의 축적, 총체적인 배움에 실제로 기초가 된다. 당신은 어쩌다 한 번씩 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연습한다. 하루를 빼먹는 것은 괜찮지만, 다음날 다시 돌아와, 연습이 삶의 흐름의 일부가 되고, 당신 삶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연습을 계속 유지한다. 그러면 시간이 전혀 없어 보이는 데서 어렵사리 조금씩 맞추어나가기보다는 상황이 영적 연습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앎으로 가는 계단을 연습한다. 당신은 아주 단순하게 시작하며, 매일 연습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시간을 내고, 연습을 고려하며, 스스로 연습에 우선순위를 두는 일과 같은 것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개인적 성실에서 나온 행위이며, 이것을 할 수 있는 개인적 힘에서 나온 행위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잘 보이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며,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호감을 사거나,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것을 하는 것은, 당신이 청결을 유지하고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일하러 가야 하는 것처럼, 이것을 해야 하고,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 삶에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된다. 이것은 당신이 매일 연습하여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며, 나는 오늘 이것에 시간을 쓰겠다”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당신 삶이 당신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놀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보려면, 당신은 몇 가지 명령을 내려야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매우 간단히 시작할 수 있으며, 시작하고 나면, 어떤 기본기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언급한 첫 번째 기량은 일관성이다. 무엇이든 일관되게 하면, 그것을 잘하게 된다. 무엇이든 일관되게 하면, 갈수록 노력이 점점 더 적게 든다. 무엇이든 일관되게 하면, 배움의 더 큰 문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앎으로 가는 계단은 자신의 경험을 매우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자아 탐구의 전체 과정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전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므로,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하다.

어쩌면 큰 사건, 슬프거나 충격적인 사건 후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평가해볼 것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래, 나는 사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어. 살을 빼야 해.” 혹은 “직업을 바꿔야 해.” “어떤 특정 방식으로 나를 개선해야 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명확히 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생각이 아니며, 단순히 새해 결심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런 인식만으로도 사람들을 행동에 옮기게 하는데 충분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앎으로 가는 계단의 연습에서, 당신은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실제로 보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이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체험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는 것과 연결된다. 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속임수,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모든 것, 숨으려 하거나 가식적으로 행동하려는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다른 대안이 없고, 숨을 곳이 없는 사람, 숨는 것이 자신에게 상처만 주고 자신의 진정한 힘을 얻는 데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실제로 정직해지고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을 연습할 때, 당신은 일관성을 기르고, 긴 과정의 자아 탐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자아 탐구의 과정은 단순히 자신과의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심리적 과정이라기보다는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문제이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의 시작부터, 앎으로 가는 계단을 공부하는 내내,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배우고, 지켜보는 법을 배우며, 바라보고, 보고, 느끼고, 아는 법을 배운다.

일단 당신이 힘을 행사하여 마음이 당신 명령대로 고요해지면, 당신은 자신의 사회적 조건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이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관념과 믿음, 생각의 관습 너머를 보기 시작한다. 당신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며, 전에는 듣지 못한 것들을 듣는다.

그런데 당신이 보고 듣는 것들은 삶에 대해 진정으로 느끼고 아는 것에 깊이 공명하고, 정확히 맞는다. 이것은 당신이 체험한 것 위에 어떤 이상이나 믿음의 덮개를 씌우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 그 반대이다. 당신은 그것들을 치울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정말 진실로 아는 것들을 느끼기 시작한다. 당신의 인식은 정제되고 더 객관적이 된다. 당신의 자각은 확장되기 시작하여, 당신은 상황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게 된다. 이전에는, 당신이 자신에 관해 어떤 것을 실제로 보고 아는 것을 막는 마음의 끊임없는 소음과 집착으로 인해 그 상황을 인식할 수 없었다. 당신은 자신의 몸과 마음, 다른 사람, 세상에 민감해지지만, 진정한 내적 힘을 가진 방식으로 민감해진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연습은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바닥에 실제로 흐르는 것과 접촉하는 데 필수 조건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모든 것을 매우 건설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당신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것을 “묵상”이라고 한다. 명상과는 다르며, 이것은 묵상이다. 당신은 삶에 관한 물음을 묵상할 것이다. 당신은 단순히 신나는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실제로 꿰뚫어 보려고 묵상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대단히 사로잡혀 있는 표면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고요 연습은 당신의 자각이 더 깊이 들어가 앎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므로, 사실 명상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 전체에 걸쳐, 당신은 이 내적 연결의 기초를 닦으며, 매일 조금씩의 진전으로 이 연결을 구축할 기회를 얻는다.

당신 삶이 변하기 시작하고,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하며, 당신은 자신과 더 깊이 연결된다. 당신은 자신이 자극보다는 조용한 것을 실제로 더 원하고, 짜릿함을 느끼기보다는 성실성을 실제로 더 원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사람들과 단지 신나는 한때보다는 실질적 힘과 방향을 가진 관계를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모두 당신이 관심의 초점을 새로 맞추고, 당신의 활동 방향을 새로 바꾸고, 이렇게 하려고 당신의 힘을 씀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 공부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당신 삶을 감독하는 천사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들은 앎으로 가는 계단에 있는 모든 말로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당신에게 단지 일련의 믿음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의 깊은 본성, 깊은 힘과 만나는 열쇠를 주고 있는데, 이것은 여기서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행하게 되어 있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전적으로 정직하고 순수하므로, 앎을 따르고 앎에 응답하려면, 당신은 실제로 정직하고 순수해져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어떤 것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당신의 부담은 가벼워지며, 당신은 자신에게 덜 집착하게 되고, 주위 모든 것에 더 깊이 연결되고, 더 잘 대응한다. 과거에는 당신이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사람들과의 문제, 어려움, 모순, 기억 등 자신에게 너무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어떤 것이 실제로 머리를 치지 않는 한, 아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마음은 감옥 같은 것이 되어 당신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지배적이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것처럼 떠날 수 없으며, 당신 개인적 마음의 한계를 떠날 수 없다. 마음은 당신을 지배하고, 제한하고, 괴롭히고, 애타게 한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자유가 전혀 없다.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여도 자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앎길을 배우면, 이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준비 초기 단계에서는 많은 것이 실제로 떨어져 나가고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자신 밖에 있는 많은 것과 너무나 많이 동일시했으므로, 이 초기 단계는 매우 불안 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이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므로, 이 초기 단계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어쩌면 앎으로 가는 계단을 6개월 정도 하고 나서, 당신은 “글쎄, 난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내 삶이 지금 당장 통합될 거로 생각했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은 많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재조정된다. 밖에서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영향을 미쳐 조정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앎은 당신 삶이 조정되도록 당신이 허용하면 곧장 조정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당신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건너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실제로 예전 삶을 해체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 집을 개조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한다. 벽지를 뜯어내고, 어쩌면 골격만 남기고 모든 것을 해체하고 나서, 다시 짓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허물고 실제로 재건하는 이 과정이 해야 할 영적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이 앎으로 가는 계단에서 하는 과정이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또한 아주 명쾌해지고, 상황이 제대로 보이고, 관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오, 세상에, 이것은 아주 분명하다. 인간관계는 대단히 단순하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당신에게 대단히 분명한데, 그다음 날은 그것을 다 잊고 다시 혼란 속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당신은 뚫고 나아가고 있다. 단번에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꺼번에 뚫고 나아가면, 당신은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여전히 자유롭지 않으므로, 그 과정에서 벗어야 할 짐들이 대단히 많다.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있고, 자유로운 순간들, 자유로운 날들이 있다. 당신은 놀랄만한 자유의 체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 자유롭지 않다.

밖에서는 문화가 끊임없이 당신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당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낡은 생각들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람들의 태도와 믿음과 가정, 즉 문화나 가족, 친구, 그리고 어쩌면 당신과 가장 가까운 관계까지 포함하여, 이들의 태도와 믿음, 가정과 같은 일반적인 특성만으로도 상당한 저항을 받는다.

그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은 아주 대단히 용감한 일이다. 당신은 자유로운 세상에 살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은 실제로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 즉 내면으로 향하는 자유, 진정한 성실성을 갖는 자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 가는 길이다.

이런 자유를 얻기 전에는 모두가 패턴에 따라 생각하고, 가르쳐준 것에 따라 생각하며, 사회와 가족의 프로그래밍을 통해 생각하도록 그들이 들은 것을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독창적인 생각이 거의 없으며, 독창성이 거의 없다. 또한, 진정한 창의력은 거의 없고, 모방이 아주 많으며,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똑같아 보이기 시작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실제로 서로를 모방하고 있다. 진정한 독창성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한 역동적 사고는 어디에 있는가?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도로를 건설하는, 사슬에 함께 묶인 죄수와 같다. 모두가 다른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개인의 자유 이면을 보면, 마치 사슬에 함께 묶인 죄수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평가하는 관점을 당신이 본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독창성이 없는지를 당신이 보고, 또 다른 모든 것을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면, 그것은 마치 사슬에 함께 묶인 죄수처럼 보인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일단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면,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볼 것이다. 그들은 외모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그들은 부와 권력과 매력 등 이런 모든 것을 보지 않으며,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마음은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볼 만큼 자유로워졌으므로, 그것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신이 준 선물이므로, 참으로 신비로운 과정이다. 그 과정은 실제로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묘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내면에서도 다른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앎이며, 당신이 앎에 일관되게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므로, 앎은 점점 더 강해지며, 당신에게 큰 영향을 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거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오, 맙소사! 내 안에는 이 큰 힘이 살고 있다. 나는 그 힘이 두렵다! 나는 그 힘이 무슨 일을 할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당신의 귀향이고, 그래서 당신이 자신을 되찾는 것과 같다. 그 힘은 아름답지만, 또한 엄청나고 강력하다.

물론 도중에 많은 실수를 범한다. 사람들은 아직 앎에 충분히 연결되지 않아, 앎을 평가할 때 많은 실수를 한다. 또한, 아직 실제로 자신을 잘 알지 못하므로, 자신에 대해 많은 가정을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주기적으로 교사가 필요한 까닭이다. 왜냐하면 책은 당신에게 행해야 할 옳은 일을 말해줄 수 있지만,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때, 책은 그 잘못을 당신에게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온 큰 영적 현실에 당신을 입문시키는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메커니즘을 지닌 책인 이 앎으로 가는 계단조차도 재능이 있는 사람, 길을 아는 사람, 이 길을 여행해본 사람의 지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을 도와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당신 내면에 당신을 더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큰 여정을 함께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당신을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샬 비안 서머즈와 같은 교사가 있고, 함께 연습하는 다른 이들, 즉 당신의 체험을 공유하고, 실수하지 않도록 당신을 돕고, 당신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때 당신에게 힘을 주는 다른 이들이 있는 것이며, 이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의 약점만은 아니다. 당신은 세상을 극복하고 있다. 당신은 자유를 얻기 위해, 세상이 당신에게 생각하고, 믿고, 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자유를 통해, 진짜 당신이 되고, 신이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여 행하도록 한 것을 하고, 당신 자신의 성실성을 되찾아 그 성실성이 당신 내면에서 나오게 하고, 당신을 위해 검증해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다른 이들이 이것을 검증하게 한다.

당신은 믿음을 극복하고 있고, 관습을 극복하고 있으며, 정부의 통제를 극복하고 있다. 당신은 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으며, 당신이 진실이라고 실제로 아는 것을 말하고 행하고 따르기를 꺼리는 당신 마음을 극복하고 있다.

이것은 혁명과 같다. 이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 말고 무슨 할 일이 있는가? 사슬로 함께 묶인 죄수로 남고 싶은가, 아니면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당신의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온종일 즐거운 활동만 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앎만이 안다. 그래서 당신은 앎길을 배우고 따르며, 그래서 양가성을 극복하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이 연습을 기분이 내키거나 어쩌면 시간이 좀 날 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 삶의 필수 활동으로 할 것이다. 당신은 자유를 얻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제 앎으로 가는 계단은 더 큰 역할도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것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큰 공동체 앎길의 일부이므로, 큰 공동체 삶의 새로운 현실에 대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도 이곳에 왔다. 어쩌면 이것은 당신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거나, 몰두하고 있는 일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과 당신 운명을 바꾸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두거나 몰두하고 있는 일 밖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당신이 더 큰 사람이 될 때, 당신은 자신이 더 큰 삶을 살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세상에서 더 큰 것과 연결된 삶을 살고, 세상에서 더 큰 것에 봉사하려고 이곳에 왔다. 큰 것에 봉사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한두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한다. 그러나 앎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봉사의 범위가 그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초년 삶이 너무 작았으므로, 그 삶에서 빠져나왔다. 그 삶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없었으며, 밖으로 빠져나와 더 큰 관점과 이해를 얻어야 했다.

물론, 인류의 큰 공동체 출현은 아주 대단히 큰 사건이며, 동시에 매우 도전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가 누구인가? 만약 모두가 사슬에 함께 묶인 무리에 속해 있다면, 모두 그저 그들이 따라야 한다고 들은 것을 따르기만 할 것이고, 시키는 것을 따르기만 할 것이다. 그들은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체제에 반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앎길을 공부할 때, 당신은 세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하며, 세상에서 작업하는 큰 세력들을 보기 위해 눈앞의 상황 너머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 삶이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앎이 생각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앎은 일상의 작은 활동이나 토요일 밤 무엇을 할 것인지에 열중하지 않는다. 앎은 큰 것을 성취하고, 큰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큰 것들에 당신을 연결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비록 당신의 궁극적 사명이 매우 단순한 일을 하는 것일지라도, 당신은 우리가 “큰 공동체 의식”이라고 부르는 이 큰 인식으로 그 일을 한다. 당신은 자신이 세상 안에도 있고, 심지어 세상 너머에도 있는 큰 공동체 일부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 최종적인 자각은 이전에 당신을 제약했던 모든 것에서 당신을 해방한다.

이 큰 공동체 의식은 더 큰 규모로 당신을 삶과 연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앎이 생각하는 방식이며, 앎이 아는 당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처음에 왜 앎과 연결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매우 작게 생각하고 있고, 앎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필요와 소망에 사로잡혀 있고, 앎은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당신을 어쩌면 전에는 전혀 없었던 세상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한다. 오늘날 세상 사람 대부분은 세상과 관계조차 없다. 그들은 그저 자기 삶에서 눈앞에 있는 것들하고만 관계를 맺는다.

큰 영은 큰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큰 영은 큰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을 세상에 있는 큰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하며, 그것은 모두 당신 내면의 앎에서 나오므로 매우 자연스러운 성장이다.

마치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이 더 큰 어떤 것을 낳도록 돕는 것과 같다. 마치 당신이 진정한 창조물을 얻도록 돕는 조산사와 같다. 당신은 이 창조물을 잉태했지만, 낳을 수는 없다. 이 창조물은 당신을 압박하고, 당신은 이 창조물을 지니고 다닌다. 이 창조물이 더 커질수록, 부담이 더 커진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낳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분만 조력 장치와 같다. 앎으로 가는 계단, 그리고 당신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당신이 낳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큰 공동체 인식을 얻으면, 당신은 자신에 대한 작은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고, 작은 집착에서 자유를 얻는다. 그 작은 집착은 당신 머리 위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과 같은 것으로, 당신을 끊임없이 짜증나게 하고, 당신의 인식을 끊임없이 제한하며, 끊임없이 당신을 자신에게 집착하게 하고, 본연의 당신과 실제로 무관한 활동과 관계에 참여하게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인류는 지적 생명체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 지구 밖에서 온 지적 종족들이 이미 지구에 들어와 인간사에 개입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큰 그림이다. 이것은 작은 사람을 위한 작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점점 더 성장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큰 그림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가슴을 알고 싶다면, 또 앎을 알고 싶고, 당신이 이곳에 정말 왜 왔는지 알고 싶다면, 큰 그림과 연결되어야 한다. 당신의 꺼림, 불안감, 두려움을 극복하고, “글쎄,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없어!”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화를 극복하라.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므로, 당신을 점차 그곳으로 데려간다. 당신이 자유로워지면, 당신 내면에서 앎이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당신을 데려간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을 조종하지 않으며, 단순히 모든 문을 열기 시작하여, 당신이 가야 할 더 큰 삶 안으로 당신 내면의 앎이 당신을 데려갈 수 있게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에게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틀을 제공하지만, 이 과정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에게 약간의 정의와 개념을 주어, 당신 마음이 따라갈 수 있도록 하고, 당신이 각 계단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밟을 수 있게 하며, 당신이 그리할 수 있도록 돕는 어떤 체계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착지에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행이며, 당신은 이 여행에 맞게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앎과 앎으로 가는 계단은 당신이 이 여정을 마치고 이곳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완수하려면,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리하여 당신은 결국 큰 공동체 사람이 된다. 이제 당신은 더 큰 삶의 무대에서 살아간다. 이제 앎은 그 자신을 표출하고, 표현하기 시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침내 이리할 수 있는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앎은 작은 사람의 편협한 인식을 통해 억지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자유롭게 드러내고 발산하며, 당신 주위에 그 은총을 보내고,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당신이 신의 매개체가 될 수 있게 하고, 진정한 당신인 영의 매개체가 될 수 있게 한다.

진정한 창의성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며, 행복과 성실의 원천이 이것이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하는 여행이다. 당신은 수십 년간의 사회적 조건화와 개인적인 잘못을 하루아침에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은 새로운 기반, 관계의 새로운 토대, 일과 건강에 대한 새로운 태도, 당신 삶의 네 기둥이라 불리는, 관계와 일, 건강, 영적 성장의 기둥, 이 모두를 함께 구축하여, 자신에게 더 큰 기반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돌파구가 보일 때, 당신은 그 돌파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큰 문턱들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큰 공동체 앎길에서 준비했을 때 오는 가능성이다. 이것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고 적용한 결과이다. 이것이 누군가 개인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닌, 신에게서 온 영적 연습을 한 결과이다.

이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큰 가능성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진실한 모든 세력이 당신을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리하여 당신이 이곳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을 완수할 수 있게 한다. 즉,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당신 삶의 큰 공동체에 참여하고, 당신의 자유를 얻는 법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자유를 얻도록 격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한다.

모든 활동 분야에서 인류의 모든 가능성, 큰 공동체 삶 안에서 인류가 자유롭고 통일된 종족이 될 가능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말하는 이 재결합인 이 핵심 연합에 달려 있다. 즉, 생각하는 마음과 내면에 사는 앎의 큰 마음 사이의 이 재결합, 이 결혼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의 축복을 보낸다. 교사의 현존이 당신과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