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9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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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나약하고, 믿음은 쉽게 도전받으며, 감정은 쉽게 일어난다. 어려움 앞에서 사람들은 용기를 잃고, 쉽게 낙담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진실과 함께할 힘이 없으므로, 진실에서 달아난다.

새로운 세상, 즉 환경 변화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격변이 있는 세상, 인류를 부양하는 지구의 능력에 인류가 입힌 손상과 마주해야 하는 더욱 어려운 세상에 직면하면, 사람들의 계획, 목표, 선호, 관계, 기존 투자 등 이 모든 것은 너무 쉽게 도전받을 수 있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이것을 실제로 직면할 수 있는 사람은 심지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거의 없다.

사람들은 이것에서 철저히 달아나거나, 아니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거나, 인류는 그 어떠한 것도 처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다. 여기서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이것을 처리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약하므로 현실을 직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믿음, 다른 사람들의 인정 등에 지배받는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서로를 추종하고, 의미 없는 긴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내면이나 서로의 내면에 결코 깊이 들어가는 일 없이 환상이나 취미, 흥밋거리 등에 빠진다.

당신은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당신에게 이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수평선 너머에서 무엇이 다가오는지 어느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당신에게 이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희망·소망·두려움과 자신의 깊은 체험을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당신에게 이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깊은 능력들이 당신 내면에 있는 깊은 마음,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앎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앎은 불변하며 영원하다. 앎은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당신과 함께 있었으며, 당신이 이곳을 떠난 뒤에도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앎은 세상에 위협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사명을 띠고 왔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당신의 나머지 부분인 당신의 몸과 마음이 세상에서 크게 봉사하고 참여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상 모두에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정직이 필요하다. 당신의 깊은 체험에 대한 정직한 평가, 앎이 당신 주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에게 실제로 알려주는 것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들을 바라보고, 마치 자신은 삶에서 구경꾼에 불과한 것처럼, 그저 잘되기만을 바라며,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처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앎을 따르는 사람은 무엇이 다가오는지 보며, 사람들이 준비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는지 본다.

이때 당신은 삶을 명료하고 객관적이고 대단히 냉철하게 직시하지만, 동시에 큰 힘과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당신이 내면의 깊은 마음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법을 배울 때, 앎의 영속성과 힘, 확실성과 결단력을 얻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즐거움과 꿈과 환상을 좇으며, 그들을 겁나게 하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서 달아나면서, 성취감이 없는 삶을 산다.

하지만 부름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세상은 당신을 위한 실험 무대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도전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의 책임을 남들에게 전가할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것을 어떻게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당신이 일반대중을 생각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당신이 초점을 두어야 할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고, 우주의 삶이 있는 큰 공동체에 인류가 진입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문제들이 아닌, 당신 삶의 큰 사건들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당신은 삶의 네 기둥, 즉 관계의 기둥, 일과 부양자의 기둥, 건강의 기둥, 영적 성장의 기둥을 세우는 일에 준비해야 한다. 식탁의 네 다리처럼, 삶의 네 기둥이 바로 당신을 받쳐주는 것이며, 당신이 실제로 얼마나 큰 삶을 살 수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책임과 지혜를 안고 갈 수 있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새 계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려면, 당신은 준비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며, 믿음체계도 아니다. 또한 단순히 당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생각들,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생각이 아니다. 새 계시를 이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게 생각하는 것이고, 계시의 힘과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계시가 당신에게 요청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직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혼자 속으로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부정직에 얼마나 깊이 기반을 두고, 혼자 속으로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 거짓에 얼마나 깊이 기반을 두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하며, 그래서 자신이 주변 세상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그 부정직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표현하니, 자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을 늘어놓고 있다.

사람들은 거짓과 잘못된 가정 위에 관계를 구축한다.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시작부터 전혀 가능성도 없었고 이곳에 온 큰 부름을 대변하지도 않은 것들에 사람들은 삶을 설계하고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이런 일은 당신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로맨스에 바치며, 사업에 바친다. 또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에 왜 왔는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베풀고 이해할 수 있는지, 이런 것과 거의 관련이 없는 것들에 바친다.

마음은 나약하다. 당신의 생각과 믿음은 대단히 확고해질 수 있으며, 당신은 그 생각과 믿음을 맹목적으로 방어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여전히 나약하다. 자신의 믿음에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약점이다. 그 약점은 당신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교만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 세상에 왜 왔는지 모르며, 누가 자신을 보냈고, 실제로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겉치레, 모든 주장, 모든 선언은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에 왜 왔는지,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이런 큰 것들에 대해 어떤 개념도 갖기 전에, 사람들은 많은 것이 요구되는 삶을 만들어 내어, 엄청난 책임을 떠안는다. 그런 다음, 이 책임들에 부응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책임들에는 당연히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큰 고통과 투쟁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이 큰 물음들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 책임들에 부응하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는 이 책임들은 실제로 진짜가 아니다. 이 책임들은 자신의 깊은 본성과 깊은 부름, 삶의 원천에 대한 깊은 책임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처럼 심각하고, 그처럼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며, 그처럼 갈등이 깊고, 그처럼 혼란스럽다. 오, 물론 그들은 큰 책임들을 지고 있고, 대단히 책임감이 있으며, 사회는 이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삶에서 자신의 부름을 놓쳤으며, 이제는 자신의 책임과 목표,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노예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경이로움을 잃고, 자발성과 창의성을 잃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들 내면은 텅 빈 것과 같다. 자신의 책임에 부응하고, 어쩌면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하며, 심지어는 국가를 이끌기까지 하지만, 그들 내면은 텅 비고, 공허하며,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그들에게 앎은 대단히 멀리 있으며, 그들은 앎을 되찾기 위해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앎을 찾기 위해 표면 마음 아래를 깊이 탐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외부 일에 너무 충실하여 자신의 우선순위와 책임들에 의문을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자신의 계획이나 목표, 활동들을 위협하거나 그것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맹목적으로 살며, 자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큰 삶에 준비시키기 위해 신이 자신에게 준 큰 지성을 활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서 분리되고, 신에게서 분리되며, 진실에서 분리된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관점이나 관념이 전부이며, 이러한 것들은 쉽게 의문을 낳고 버려질 수 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서 버려질 수 없는 진실, 관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실을 다룰 수 없다. 진실은 오직 정직하고만 관련되어 있다.

당신은 자신의 부름이 준비하라는 부름임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큰 삶에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면의 앎을 이해하고 따르는 데 준비되지 않았으며, 앎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른다. 앎은 여전히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당신 내면의 작은 목소리에 불과하다. 당신은 앎의 큰 힘과 효능을 이해할 만큼 앎에 충분히 근접하지 못했다.

앎은 이성보다 천 배 이상 더 강하다. 하지만 당신은 앎을 이성의 도구, 즉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도와주고 어려움을 피하는 데 쓰는 도구로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런 오해가 있다. 사람들은 신을 자신의 종으로 생각한다. 모든 것이 신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서, 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것이고, 모든 문제에서 자신을 도와줄 것이며,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해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버리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직성과 용기를 가지고서 이런 생각들에 의문을 품고, 그 생각들을 다각적으로 검토해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또 이 생각들이 정말 진실인지, 눈곱만큼의 진실성이라도 있기나 한지 알아보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의 노예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화에서 벗어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신의 첫 번째 목적이 당신의 짐을 벗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불필요한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가능성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것들을 가지고 몸부림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문화·가족·종교의 노예이며, 앎에 기반을 두지 않은 관념과 믿음의 노예이다. 그리고 앎에 기반을 둔 것은 당신이 쉽게 분별할 수 없다.

앎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검불밭에서 바늘 찾기다. 당신은 바늘을 찾기 위해 많은 검불을 제거해야 한다. 당신이 준비에서 하는 일이 대체로 이런 것이다. 거짓된 것이나 비현실적인 것,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은 데 당신이 갈망하는 것 등을 제거하는 것이다. 실제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어도 된다. 그래서 그것은 당신의 주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고, 당신의 집착이다.

사람들은 백만 년 안에는 결코 함께 큰 여행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 인상이나 개성, 매력을 바탕으로 사랑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너무 헌신적이어서 자신의 삶을 모두 내준다. 그들은 개성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집착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마치 어떤 마약처럼, 사랑에 중독된 후, 대단히 어려운 금단 현상을 겪어야 한다. 중독에는 물질 중독과 사람 중독이 있다. 사람 중독은 사랑이 아니며, 집착이다.

앎이 당신 삶에 실제로 장래성을 지닌 이들, 당신을 위해 실제로 의미 있고 중요한 관계가 될 가능성을 지닌 이들에게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 역시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삶의 큰 현실에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부모들처럼 세상에 나가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큰 목적을 지닌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준비가 중요시되고, 정직이 중요시되며, 인내와 결단력이 중요시된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당신을 앎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당신의 다른 모든 동기들, 즉 부·즐거움·평화·사랑·로맨스와 같은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나아가면서, 한 편으로 제쳐 두어야 한다. 당신은 그것들을 가지고 산을 오를 수 없다. 그것들은 너무 무거우며, 불필요하다.

그래서 학생은 자신이 이미 마음에 품고서 행하고 있는 것들을 원상으로 되돌리는 과정에 있으며, 잘못된 기대·목표·계획·소망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 있다. 그렇다고 당신이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정직해지는 것이다. 기본적이고 단순해지며, 깊이 정직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양식이 아니다. 당신은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정직해지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경향을 볼 수 있고, 자신의 체험 안에서 그 거짓말을 교정하고 객관화할 수 있을 만큼, 정직해지는 것이다.

준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이전에 직시하지 않았던 것들을 직시해야 하고, 이전에 숙고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숙고해야 한다. 또한 당신의 믿음과 가정들에 의문을 가져야 하고, 당신 문화나 가족의 믿음과 가정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당신 종교의 믿음과 가정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이 용기를 되찾는다. 왜냐하면 이 용기는 표면 마음 아래, 당신 내면 깊숙한 곳, 소용돌이치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표면 마음 아래, 확실성과 지혜와 앎이 있는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 두렵고, 너무 쫓기고, 너무 강박적이어서 5초 동안도 고요히 있을 수 없다.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하면, 마음은 야생 동물처럼 온갖 곳을 쫓아다니며, 동시에 작동하는 텔레비전의 모든 채널처럼 여기저기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

당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 마음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마음일 뿐이며, 마음은 그 안에 담긴 모든 인상이나 정보, 문제 해결 등을 때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때로는 꿈속에서처럼 공상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용기는 당신 내면에서 간절히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고 느끼는 것에서 나온다. 용기는 실제로 앎에 응답하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대단히 미약하고 간헐적으로 응답하겠지만, 앎이 당신에게 응답하라고 부르고 있다.

신은 당신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한다. 구름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산이 울릴 정도로 웅장한 목소리가 당신 이름을 부르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며, 심지어 성자나 위대한 메신저에게도 그 과정은 똑같다.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믿음과 순종을 유도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이다.

당신은 응답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며, 삶에서 가야 할 곳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당신은 주위에서 보는 모든 사람처럼 삶을 마감해서는 안 되며, 마음이나 문화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의미 없는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며, 부를 쌓기 위해 노예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로 당신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외부에서 무엇이 당신을 제한하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부에서 무엇이 당신을 제한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믿음·가정·소망·두려움에 불과한 것들로 현실에서는 거의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들 아닌가!

여전히 달은 뜨고, 해는 빛나며, 계절은 바뀐다. 또 풀은 자라고, 새들은 날며, 물고기들은 헤엄쳐 다닌다. 그래, 당신의 인식을 흐리게 하거나 명료하게 해주는 것 말고, 당신의 생각이 무엇을 달라지게 하는가?

이것은 당신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사는 비참한 현실을 대체하려고 더 나은 환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환상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비참하다. 왜냐하면 환상은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고, 당신 내면의 앎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환상에 투자하면 할수록, 당신 삶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당신은 점점 더 세상을 두려워한다. 당신은 점점 더 변화를 두려워하고, 상실을 두려워하며, 정직을 두려워한다.

신은 당신에게 정직할 것을 요청한다. 이 정직에서 당신은 자신을 위한 큰 길과 당신 삶에 있는 큰 부름, 가시 영역 너머에 있는 큰 연합을 알아보기 시작할 수 있으며, 놀랍고도 생산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참여하는 새로운 기반을 알아보기 시작할 수 있다.

준비하려는 의지와 용기: 여기서 용기는 결과에 대한 어떤 확실한 보장도 없이 어려운 것들을 떠맡는 것을 말한다. 용기는 쉬운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사업장에 들어가 일함으로써, 거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 펼쳐진 길이 아니다. 당신은 준비도 되기 전에 자녀를 가져, 자녀가 당신 삶의 책임을 결정한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아무런 실마리도 없이 결혼한다. 그러므로 결혼은 당신 삶을 결정하며, 결국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만다.

세상 모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에서 자신의 큰 부름과 목적에 응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응답하는 비율이 낮으면, 세상은 항상 어려움과 갈등의 상태에 있고, 갈등과 몰락의 끝자락에 있다.

사람들은 동물의 무리처럼 맹종하게 된다. 그래서 전쟁에 내몰리고, 불필요한 소비에 내몰리고, 정치적 설득에 내몰리고, 종교적 믿음에 내몰리며, 이때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 느낌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마음의 표면에서 산다. 마음의 표면은 바다의 표면처럼, 소용돌이치고, 세상의 바람에 휩쓸리며, 어느 날은 고요하고, 어느 날은 출렁거리며, 심지어는 사납게 휘몰아치기도 한다.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은 바다의 거대한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없다. 심해에서는 물이 전 세계에 걸쳐 컨베이어 벨트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당신은 그 바다 안에서 사는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다와 기후와 지구의 체계가 비록 복잡하지만, 얼마나 체계적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그저 휘몰아치는 것만 보고, 배를 조종하는 뱃사람들처럼 거기에 적응하려고만 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뱃사람들은 해류와 바람의 흐름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으며, 그래서 많은 것을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에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또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바람은 당신 마음을 사방으로 몰고 다닌다. 당신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당황하게 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게 하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동하게 하기도 하고, 겁나게 하기도 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당신은 삶의 큰 방향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당신은 내면에 있는 앎에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가지려면, 이런 세상의 바람에서 제법 멀찍이 물러나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사회 활동이나 대중 매체 등 많은 것에서 일정 기간 동안 뒤로 물러나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자신의 깊은 체험을 알아차릴 기회를 갖는다.

우주의 주인은 당신 스스로 제공할 수 없는 대단히 효과적인 준비서인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였다. 당신이 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따르면, 진실한 것은 점점 더 강해지고, 거짓된 것은 점점 더 약해진다. 또한 당신은 자신의 삶이나 결정에 더 신중해지고, 시간을 쓰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조심하며, 주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더 높아진다.

마음이 더 고요해지면, 당신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감지하기 시작하고,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듣는다. 또한 당신 내면의 앎과 다른 사람 내면의 앎에 점점 더 많이 응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앎과 그 밖의 다른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안다.

천사의 현존은 누가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지 보고, 그런 다음 그들이 준비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려는 용기, 자신이 알아볼 수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산을 오르려는 용기가 있는지 보기 위해 지켜본다. 천사의 현존은 누가 삶의 진정한 여행, 실질적이고 강력한 여행을 할 수 있는지, 누가 앎에 응답할 수 있고, 준비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 지켜본다.

그래서 준비는 실험 무대가 된다. 당신이 이 준비를 할 수 없다면, 세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어떤 일을 하기로 된 큰 운명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준비에는 배우는 것보다 배운 것을 버리는 것이 더 요구된다. 당신이 자신의 기존 관념을 내려놓고 큰 이해에 접근하려면, 엄청난 혼란과 불확실성의 시기를 거치며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공중그네 곡예사처럼, 건너편 봉을 잡으려면, 쥐고 있는 봉을 놓아야 한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을 때는 텅 빈 상태가 될 수 있다. 당신은 기존의 당신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되기로 한 것이 아직 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공허의 시기, 불확실성의 시기를 통과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스러우며, 배움의 한 부분이고, 준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시기를 통과해서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은 앎이며, 앎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앎의 증거이다. 즉, 당신이 지금까지 습득했고 그에 맞추어 점점 살아가는 앎의 증거, 당신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들의 삶에 있는 앎의 증거이다.

당신은 이 준비를 거쳐야 한다. 당신은 큰 부름을 실제로 이해하고 나서 응답할 수 있을 만큼, 아직은 자신의 내면에서는 물론 심지어 삶에서 서 있는 위치에서조차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

그래서 부름은 준비하는 것이며, 준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용기는 정직에서 나온다. 당신은 깊은 정직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려는 동기는 앎에서 나온다.

앎이 당신을 앎에 데려갈 것이다. 앎은 당신을 불확실성의 시기를 거쳐서 데려갈 것이다. 앎은 불변이다. 앎에 대한 당신의 접근이 달라지면, 앎에 대한 당신의 체험도 달라질 수 있지만, 앎은 한결같다. 앎은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앎은 마스터이고, 당신은 학생이다.

하지만 여기서 당신은 새 계시를 배우고 적용하는 데 자신보다 더 진보한 학생인 다른 교사들도 필요하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세상에 있는 메신저에게 직접 배우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가 세상에 있고, 이때 당신이 그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고 나면, 메신저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한 것에 의지해야 할 것이며, 이것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대단히 위험할 것이다. 잘못은 쉽게 범할 수 있다. 메시지는 변경될 수 있고, 섞일 수 있으며, 희석될 수 있다. 실제로 큰 힘에 의해 전혀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이들이 권한과 지도자 위치를 맡으러 올 수 있다.

계시의 시대에 사는 것, 메신저의 시대에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메신저가 무수히 많은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으므로, 당신은 메신저와 개인적 관계를 맺지는 못하겠지만, 그에게서 배울 수는 있다. 그가 세상에 머무는 시기에 당신이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그는 노인이며, 이곳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혼란과 복잡성, 심지어 당신 내면에 있는 속임수를 헤쳐 나가려면, 또 끊임없이 변하고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당신에게는 안팎으로 강한 영향이 필요하다.

당신에게는 앎의 힘이 필요하고, 동시에 강한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훌륭한 예들, 즉 당신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당신이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예들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새 계시에 다가와서 그저 축복받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저 축복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돌보아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영적 복지 속에 있기를 바라며, 신은 그저 제공하고 또 제공하고 계속 제공할 것이니, 자신에게 올 것으로 생각되는 기적들을 자신은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직하지 않다.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면, 실질적 참여가 필요하고,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과 에너지 투자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변화와 적응이 필요하다.

당신은 어떤 사람과 그냥 결혼하여, 상대방이 당신 생각대로 해주고, 자신은 상대방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며, 상대방과 함께하는 데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마음가짐으로 결혼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엄청난 무지이지만, 애석하게도 사실이다.

부름은 응답하는 것이다. 응답하고 나면, 부름은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는 중요하다. 하지만 준비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헌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 공헌은 당신이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 진보를 하였든, 그 진보에서 나올 것이다.

심지어 앎에 응답하는 당신의 모습마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이다. 또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어떤 타협을 하는 것을 꺼리는 것마저도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이때 만약 당신의 배움이 진정한 것이라면, 당신은 배우면서 자동으로 가르친다. 사실, 당신은 항상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과 자신이 믿는 것을 본보이고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가르친다. 그래서 당신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보여주는 본보기의 일부가 된다.

이때 당신이 맺은 관계들이 변한다. 기존 관계들이 멀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과 함께 여행할 수 없고, 새로운 관계들이 지평선 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 삶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일부분이다. 앎의 기적ㅡ무대 뒤에서 진행되며, 인간의 활동이나 추정, 기만, 믿음의 영역을 초월하여 진행되는 복원과 회복에 대한 신의 계획에서 나온 기적의 일부분이다.

당신은 큰 책임을 맡고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 특정 상황에서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한 어떤 것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 앎이 당신을 준비시켜야 하며,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앎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당신은 마음을 다스려야 하며, 마음이 당신을 계속 떠받치게 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 삶의 큰 목적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큰 목적을 위해 당신은 큰 힘을 따라야 하며, 큰 힘은 당신 내면에 있는 앎 안에 있고, 계시 자체 안에 있다.

이 큰 힘은 알아볼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큰 종교 안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큰 종교들은 관습과 믿음, 가정, 연상 등으로 너무 덧씌워져, 이 모든 것을 통과하여 이 종교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가리키는 본질에 도달하려면, 대단히 유능한 교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종교들은 모두 앎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표면에서 보면,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새 계시가 이곳에 온 이유, 또 우리가 메신저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말하기 위해 지금 다시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 계시를 통해 당신에게 말하며, 당신에게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는 대단히 크다. 또한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고, 요건이 대단히 크며,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가 대단히 크다.

지금은 강해져야 할 때이며, 용감하고 정직하고 동정심 많고 단호해야 할 때이다. 이때 당신은 산송장이 아니라, 정말로 생동감 넘치게 살아 있다. 이때 당신은 정말로 창의적이고, 당신 마음은 앎에 연결되며, 당신 내면에서 분리가 점차 종식된다. 이때 단순히 자신이 행한 큰 일에서뿐만 아니라, 단순한 행동들에서, 또 당신 자체, 당신이 하는 것, 당신이 하지 않는 것 등에서도, 당신 삶은 세상에서 신의 현존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신은 당신을 안에서 밖으로 구한다. 신은 분리된 이들을 앎을 통해 회복한다. 국가나 행성들은 앎이 그곳에 사는 주민들 안에서 얼마나 많이 표현되느냐에 따라 더 강해지고, 더 안정되고, 더 창의적이 된다.

이것은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전역에서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다. 하지만 당신의 이성은 그 역할이 있다. 이성은 소통하고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다. 하지만 이성은 큰 안내자와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여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당신은 부름받았다. 그러니 이제 준비해야 한다. 준비는 당신 내면에 있고, 우주의 주인이 제공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을 용기를 되찾아야 하며, 이 용기와 더불어 인내와 끈기를 되찾고, 신중함과 분별력을 되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거짓된 것에서 진실한 것, 보기에만 좋은 것에서 실제로 좋은 것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행이다. 이것이 삶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여행이다. 그리고 이 여행을 알고, 이 여행이 주는 선물을 알게 된 당신은 축복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