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된 계시의 원음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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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6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녹음에 관하여

당신이 이 오디오 녹음에서 듣는 것은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를 통해 천사의 회중이 말한 음성이다.

여기에, 언어 차원을 넘는 신의 본래 메시지는 지구를 관장하는 천사의 회중에 의해 인간의 언어와 이해로 번역된다. 그리하여 회중은 메신저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놀라운 과정에서, 계시의 음성이 다시 말하고 있다. 말씀과 음성이 세상에 있다.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계시의 원음을 당신과 세상이 체험해볼 수 있다.

당신이 이 계시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당신과 당신 삶을 위해 계시의 유일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마음을 여는 사람이 되기를 빈다.

독자에게 알림

이 번역은 영어 원문 번역을 자원한 새 메시지 학생이 협회에 제공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새 메시지 일부와 만날 기회를 갖도록 이 같은 초기 형태로 이 번역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신은 모든 사람 각각에 깊은 지성을 주었다. 이 지성은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사회적 조건화의 산물이 아니다. 또한 당신 가족이나 문화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 내면에 있는 이 깊은 지성은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려고, 또 세상에 당신을 파견한 큰 목적을 당신이 발견하여 이룰 수 있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 이 깊은 지성은 개인적 마음처럼, 즉 가족과 문화와 종교에 조건화된 마음인 표면 마음처럼, 생각하거나 숙고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 내면에 있는 신의 마음이며, 오직 신에게만 응답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중립적이고 자비로운 큰 지성이다. 이 지성은 큰 목적, 즉 당신이 현재 상황에서 세상에 봉사하고, 과거와는 다른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반을 다지려고 이곳에 온 큰 목적을 찾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당신 내면에 사는 이 큰 지성, 이 영적 지성은 당신 이성 너머에 존재하고, 당신의 추론 너머에 존재하며, 당신의 이해 너머에 존재한다.

지금 당신의 일은 내면에 있는 이 큰 지성을 이해하려 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지성에 응답하는 법, 이 지성이 주는 신호를 알아보고, 그 안내를 따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당신 내면에 있는 이 큰 지성이 큰 삶에 당신을 준비시킬 때, 즉 과거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개인적 곤경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하며, 새로운 영역으로 당신을 데려가고, 당신을 위해 더 큰 기회를 만들어줄 때, 당신의 책임(responsibility-응답 능력)은 이 지성을 알아차려 그 신호를 따르고,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안내를 따르는 것이다.

이 큰 지성이 발견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념과 믿음, 다른 사람들의 관념과 믿음과 기대에 따라 산다. 그들은 사회적 조건화에 지배받으며, 또 자신의 두려움과 선호에 지배받고, 문화의 일반적인 믿음과 사고방식에 지배받으며, 마음의 가장 표층에서 산다. 순응하는 자든, 반항하는 자든 상관없이, 그들은 이 문화를 따를 것이다. 문화는 그들의 사고와 감정, 결정, 세상에 대한 인식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 내면에는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큰 지성이 있으며, 이것을 앎이라고 한다. 이것을 앎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아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아는 이 체험은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며, 증거를 축적한 결과도, 추론이나 논쟁, 토론의 산물도 아니다.

그래서 이 체험은 당신의 안녕과 자신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대단히 핵심적이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관념, 믿음, 성향, 두려움, 사고방식 등의 목록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리한다고 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세상에 의해 당신이 조건화된 정도나 당신의 인간적 약점을 열거할 뿐이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는 앎을 통해 연결되고, 앎을 통해 표현된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당신이 앎을 체험하고 있지 않을 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앎을 믿고, 신을 믿고, 내면에 있는 더 큰 어떤 것을 믿는다. 하지만 믿음은 당신의 개인적 마음인 표면 마음에만 의미가 있다. 앎 자체에는 믿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에는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앎은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은 상실과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앎은 죽지 않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앎에는 대단한 자신감과 엄청난 확신이 있다. 앎은 세상에 영향을 받거나, 변질되지 않으므로, 당신 내면에서 당신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항상 변하므로 믿을 수 없다. 당신의 믿음은 사람들끼리 동의한 것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신뢰할 수 없다. 만약 그 믿음이 잘못된 가정에 기반을 두면,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거짓되고 부정확한 어떤 것에 동의하고 있다.

당신은 신을 체험하고 있지 않을 때 신을 믿는다. 또 앎을 체험하고 있지 않을 때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이 신을 체험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환상적인 환시나 고양된 체험, 감동적인 충만감을 가지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실제로 당신과 신의 관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무엇을 함께할 수 있는가, 또 본질과 행동 양쪽에서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동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신의 본질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이곳에서 관계를 제대로 맺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곳에서 관계는 본질에서 관계일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관계도 되어야 한다.

행동하는 관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들이 서로 협력하여 함께 무언가를 하려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앎을 실제로 체험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앎의 힘과 효능이 당신의 인식에 싹터 당신 삶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신과 당신의 관계가 실제로 활기를 띠고, 당신 내면의 기반이 되고, 당신의 모든 결정에 기준점이 된다.

이성에게는 앎이 유령처럼 여겨지거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혹은 마음에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한다. 이는 마음이 두려워하며,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만약 앎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에 봉사하고, 마음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마음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이루게 해주기 위해 여기 있을 것으로 믿는다. 사실, 사람들은 신이 그들 마음에 봉사하고, 그들 생각을 입증해주고, 그들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그들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 무지와 오만은 당신이 실제로 숙고해보면 아주 명확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표면 마음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전 우주가 자신들에 관한 자신의 관념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표면 마음이란 단지 관념과 가정의 거대한 집합체일 뿐이지 않은가? 여기에는 실제로 전혀 실체가 없으며, 영속적인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그처럼 매여 있고, 자신의 관념에 그처럼 요지부동이다. 또 자신의 관념이 현실 자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신과 신의 일, 신의 말, 신의 메시지, 신의 메신저에 대해 자신이 확실히 안다고 공언한다. 이것이 그들의 관념을 위해 신이 일한다고 믿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예이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가정에 단단히 매여 있어, 본질적으로 참이고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자신의 믿음과 가정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의 관념은 관념일 뿐이다. 그 관념 너머 훨씬 더 큰 진실과 현실이 있다. 하지만 관념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념은 이 큰 현실을 보도록 허용하거나, 보지 못하도록 완전히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의 질이 중요하며, 그 때문에 새 메시지 연습서인 앎으로 가는 계단 공부에서 당신은 앎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개인적 마음인 표면 마음이 내면의 큰 지성과 힘과 지배권을 놓고 싸우기보다는 서로 조화롭게 일할 수 있도록, 표면 마음을 효과적으로 쓰는 법을 배운다.

만약 당신이 생각에 완전히 지배당하면, 당신 내면의 앎은 드러날 수 없다. 만약 당신의 관념과 믿음이 현실 자체라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앎이 드러날 공간이 없을 것이고, 당신은 앎을 두려워할 것이다. 앎이 자신의 관념을 위협할까 봐 두려워하고, 자신의 목표와 계획을 망쳐놓을까 봐 두려워하며, 사실이고 진실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자신이 여긴 것을 의심과 혼란에 빠뜨릴까 봐 두려워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내면에서 진실이 드러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비록 당신이 신을 믿고, 숭배하고 있을지라도, 당신 체험에서 신의 지혜가 드러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다. 신이 당신을 안내할 자리가 없다. 신이 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또 당신이 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처럼 엄격한 한계를 정해 놓았으니, 신의 지혜와 안내가 당신 내면에서 드러날 여지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관념과 믿음이 일시적 체험임을 알아야 한다. 관념과 믿음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그것들은 당신이 보고 알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데, 당신을 도울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다. 또한 당신이 내면의 앎과 결합하도록 허용할 수도 있고, 이 결합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도 있다.

당신의 관념은 큰 현실에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큰 현실과 싸우거나, 그 현실을 부정하거나 통제하려 하거나, 그 현실의 궁극적인 상태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앎은 당신에게 확실성과 힘을 주지만, 여기에는 당신의 겸손함도 필요하다.

이때 당신은 자신의 관념과 믿음에 대한 주장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며, 심지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실제로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지못해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고, 또 자신의 관념과 믿음과 열망을 충족시키려 애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은 그저 마지못해 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불확실성과 불안의 깊은 구렁, 자기 의심과 자기 비난,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의 깊은 구렁이 있으며, 세상과 미래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변화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상실과 궁핍과 자멸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있다.

당신 주위 사람들이 아주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쩌면 그들 스스로 단호하게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밑바닥에는 두려움의 깊은 구렁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할 뿐이므로, 자신에게 현실감과 목적의식, 방향의식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관념을 위협하는 어떤 것이 나타나면, 자신의 삶 전부가 위협받고 도전받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이 틀린 것을, 또 틀렸음이 입증되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한다.

그래서 당신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들일 수 있다.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단호하게 주장하는 이들, 그런 확실성과 독선으로 다른 이들을 훈계하는 이들이 당신들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은 파괴적인 양상을 띤다. 그들의 무지는 그들에게 가려져 있으며, 그들은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

그래서 흔히 앎은 당신이 자신을 강하게 의심하는 시기나 어렵고 당혹스러운 결정에 직면할 때, 드러난다. 그래서 앎은 당신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때나 실수를 범했을 때, 당신에게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이런 순간들에는 당신이 내면에서 큰 지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자리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귀 기울이는 데 마음을 더 열고 있으므로,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아차리고, 더 겸손하고 수용적이므로, 신은 이제 당신에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앎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당신이 정말 앎을 원하느냐, 아니면 그저 앎이 당신을 불확실한 시기에 안심시켜주고, 나약한 시기에 당신 힘을 북돋우기만을 원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당신이 배의 선장이 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은 큰 힘이 당신 내면에서 드러나기를 정말 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힘의 경쟁인 분리의 핵심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자신이 나약하고 무력하다고 느낄 때만 당신 삶에 신이 힘을 갖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나머지 시간에는 당신이 그 힘을 갖기를 바란다. 이것은 힘의 경쟁이다.

이것이 태초에 분리를 창조한 것이며, 또 분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과 지구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우주 전역에서 동일하다. 분리된 이들이 사는 창조의 이 부분은 확신하건대 창조의 매우 작은 부분이지만, 분명히 당신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대단히 크다.

신은 완벽하게 안내하는 지성을 당신에게 주었다. 이 지성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을 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여기 왔다. 이 지성은 당신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고 여기 왔다. 이 지성은 마음의 노예가 아니며, 주인이다. 당신 마음은 그 종이 되어야 한다.

이때 권한의 진정한 위계질서, 즉 몸이 마음을 섬기고, 마음이 앎을 섬기며, 앎이 신을 섬기는, 이 질서가 구축될 수 있다. 앎은 세상에서 위대한 평화중재자이다. 왜냐하면 당신 내면의 앎은 다른 이들 내면의 앎과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다르게 해석할 수는 있다. 앎은 당신 내면에서 다르게, 그리고 독특하게 단호히 주장할지도 모르며, 어느 정도는 그리하겠지만, 만약 당신들이 앎의 안내를 받는다면, 당신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싸울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은 자신을 공격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앎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또한 개인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고, 국가들이나 그룹들 사이에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앎이 실현되고 표현되는 정도에 따라, 국가가 전쟁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평화와 평화적 관계의 기반을 구축하려 할 것인지 결정이 날 것이다.

세상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앎의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지배받는다. 상실과 궁핍의 두려움에 지배받고, 자신의 욕망에 지배받고, 자신의 불만과 불신에 지배받는다. 당신이 앎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앎은 여기 왔으며,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각자의 내면에 있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 너머,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충족하는 것 너머, 삶에서 당신의 큰 일은 앎을 찾아 따르는 것이며,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오직 가정만으로 움직일 것이다. 당신은 과거의 조건화에 지배를 받으며, 눈을 감은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과거의 조건화에 지배받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고, 미래를 예견할 수 없으며, 세상의 신호들을 볼 수 없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의 것이 아닌 생각에도 지배받고, 문화나 가족, 사회에서 채택한 사고방식과 믿음에 지배받으며, 눈을 감은 채 살아갈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 모른다. 당신 주변 세상에서 드러나는 큰 문제들, 또 심지어 당신 자신의 내적 갈등과 어려움, 성질 등 내면의 혼란스러운 문제들까지, 당신은 자신이 보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상 문제들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또 당신 내면에서 볼 수도 있는 문제나 쟁점들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신은 답을 제공하였으며, 그 답은 새로운 방향으로 당신 삶을 움직이려고 이곳에 온 큰 지성이다.

당신은 부자가 되기 위해, 또 원하는 것을 얻고, 다른 이들을 이기기 위해, 앎을 이용할 수 없지만, 당신 삶에서 새로운 기반을 다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앎을 따를 수는 있다.

앎이 당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을 허용하라. 또한 당신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것을 허용하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당신의 능력, 사랑과 큰 지혜를 체험하고 표현하는 당신의 능력을 회복시켜주는 것을 허용하라. 이 큰 지혜는 당신이 어렵고 변하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울 때 앎이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다. 문제들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이고, 그 문제들을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데 당신이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당신 내면에는 앎이 있다.

앎은 단순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당신에게 큰 삶을 주고,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방식으로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게 하려고 이곳에 왔다. 앎은 높은 목적의 수준인 더 높은 수준에서 특정 사람들과 당신을 결합하게 할 것이다. 앎이 당신을 위해 삶에서 정해놓은 방향은 당신이 이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하고, 또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은 물론 세상 자체와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의 역할은 거창하지 않다. 당신은 구세주나 화신이 되지는 않겠지만, 당신의 봉사는 매우 중요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앎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앎의 시범, 앎의 현실은 가장 큰 선물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줄 수 있으며, 이것은 다가오는 어려운 시기에 점점 더 필요할 것이다. 또 그 밖의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며,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진짜이다. 하지만 당신의 가장 큰 선물은 앎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당신은 그들이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당신 스스로 생각과 행동으로 이 연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당신을 돕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앎과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당신을 움직이고, 안내하고, 제지할 것이며, 당신을 붙잡기도 하고 앞으로 이끌기도 할 것이다. 만약 신의 힘이 당신 삶에, 또 당신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신의 힘에 봉사하도록 자신의 힘을 가져가야 한다. 신의 힘과 싸우거나 투쟁해서는 안 되며, 신의 힘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했을 때, 당신이 원하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전쟁, 마음의 욕망과 앎의 확실성 사이의 전쟁, 신과 당신 사이 분리를 창조한 전쟁 등 당신 내면에서의 싸움이 이때 끝날 것이므로, 당신에게 평화와 해결책이 온다.

분명하게도, 신은 당신과 싸우지 않지만, 당신은 여전히 신과 싸운다. 왜냐하면 당신이 신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삶에서 신이 되기를 원하고,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자 하고, 신에게서 떨어져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하지 말고,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당신이 보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모든 곳에서 인간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당신은 세상에 큰 운명이 있다. 신은 특정 사람들과 특정 업무를 완수하도록 당신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이것에 대한 정보는 당신 앎 안에 담겨 있다. 이것을 완수하도록 하는 안내는 당신 앎 안에 있다. 세상에 하는 이 공헌의 의미는 당신 앎 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당신은 앎을 생각해낼 수 없으며,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오직 앎을 따르고, 앎에 봉사할 수만 있고, 당신이 이것을 행하는 것을 돕도록 이성의 힘을 이용할 수만 있다.

기본적으로, 앎의 현실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삶 자체는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 신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 영감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신과 함께 있도록 되어 있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당신은 왜 그런지 몰라도, 행복할 수 있고,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도, 기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영감을 설명할 수 없어도, 자신의 삶에서 영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당신의 큰 일은 삶에서 앎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이다. 즉, 정직과 명료성과 겸손함을 가지고서, 자신이 큰 목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삶에서 진리의 참된 끈과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마지못해 하면서, 자신의 관념과 믿음과 가정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실행에 옮기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내면에서 삶의 깊은 흐름과 제대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자각하라. 이것을 인정하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을 자각함으로써, 더 큰 어떤 것이 당신 내면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당신은 십 분 만에 모든 것을 자각할 수 없으며, 오늘 모든 것을 자각할 수는 없다. 이 자각은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당신은 자각하여 거기에 적응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생각과 믿음을 재고해볼 시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몸과의 관계, 마음과의 관계를 재평가해볼 시간이 있을 것이고, 사회적 조건화의 산물인 한 개인에서 이제 큰 힘의 안내를 받는, 앎을 따르는 사람으로 바뀌는 큰 전환을 거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이 큰 힘은 신비롭지만, 여전히 그 현존과 안내는 가장 실용적이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의 큰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당신의 큰 목적은 앎에 기반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큰 목적은 오직 알 수만 있으며, 토론이나 고찰을 통해서는 알아낼 수 없다. 또한 당신 내면의 이 큰 힘과 함께하지 않고는 이성적 노력만으로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힘은 당신의 큰 목적을 담고 있으며, 당신에게 활력과 명확성을 주어, 당신이 이 목적을 발견하고 체험하여, 이 목적이 표현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당신이 만약 자신의 선호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그 표현 방식은 단순하다.

신은 가까이에 있으며,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고 큰 성취로 이끌기 위해, 내면에 신이 심어놓은 신의 힘은 매우 가까이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성취가 드러날 수 있도록 당신 내면에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스스로 답하지 않으면서, 묻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과 자기 생각의 한계를 깨닫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줄곧 자신으로부터, 또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삶의 큰 움직임으로부터 단절되어, 필사적으로 자신의 환상과 욕망을 채우려 애를 쓰고 있으니, 당신 주변 세상에 앎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세상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당신은 자신 안에, 다른 사람들 안에, 또 인간 가족 전체 안에, 앎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큰 삶을 살 수 없으며, 자신을 알 수 없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을 알아볼 수도, 그들과 함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앎이 없다면, 당신은 자신이 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고, 자신에게 세상 너머에 큰 운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당신이 큰 삶과 큰 운명을 믿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것들이 진실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이 가중되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당신은 앎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야 하며, 앎이 당신 내면에서 큰 현존이 되고 당신 존재의 바탕이 되고 당신의 근본적인 기준점 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원하거나 갈망할 때, 자문해보라. 그것이 당신에게 중요한지, 내면의 앎에 물어보고, 응답이 있는지 한번 보라. 당신 마음은 어떤 것을 원하며, 당연히 그리한다. 이 사람을 원하고, 이 장소에서 살고 싶어 하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특권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면에 있는 앎에 가서, “당신은 나를 위해 이런 것들을 원하는가?”라고 물어보라. 당신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은 응답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앎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앎은 그런 갈망이 없다. 당신은 이 사람, 이 장소, 그 밖에 다른 무엇이 됐든, 그것을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곧장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 가슴이 그것을 정말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신 마음은 그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두렵고, 자신이 없고, 초조하고, 불편하기 때문이고, 앎 없이 자신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며, 초조하다.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하며, 이것을 두려워하고, 저것을 두려워한다. 마음은 일순간도 평화로이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당신은 앎에 다가가, “이것이 나에게 중요한가?”라고 묻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경우에는, 앎이 단호하게 “아니야.”라고 알려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당신이 자신에게 정말 해로운 어떤 것이나, 당신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데려갈 어떤 것, 당신을 정말로 뒤로 가게 하는 어떤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앎은 당신 내면에서 저항하는 느낌과 제지하는 느낌을 일으킬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식 날, 자신이 진정한 가능성이나 운명이 전혀 없는 어떤 것에 자신의 삶을 지금 내맡기려고 하고 있다는 큰 반응과 제지를 느끼면서, 예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는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당신은 이 저항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이 저항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신호이다. 이것은 당신이 앎에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신 이성의 위, 아래, 저 너머, 모든 곳에 스며 있는 당신 존재의 바탕인 앎의 현존을 당신이 내면에서 충분히 강하게 느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제법 감각적으로 느껴지므로, 이것을 직감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앎은 직감보다 더 큰 것이며, 당신 내면에 있는 더 큰 지성이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앎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좇지 말아야 한다. 만약 앎이 제지하거나 저항하는 느낌을 일으킨다면, 당신은 뒤로 물러서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매우 위험하고 중대한 결정을 막 내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서는 앎이 당신에게 하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그래, 이것을 하라. 이 사람과 함께하라. 이곳으로 가라. 이것을 행동에 옮기라.”라는 뜻이다. 당신은 자신과 확인을 하였으므로, 내면에 커다란 청신호가 켜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의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한다. 그들이 삶에서 만들어 낸 불행은 모두 항상 좋아 보이는 어떤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겉모습에 유혹된다. 부의 약속, 즐거움의 약속, 사랑의 약속, 행복의 약속 등, 겉모습에 유혹된다.

만약 그들이 앎에 다가가면, 그들은 그 끌림이 실제가 아니라, 기만이고,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앎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들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앎이 감명을 받지 않으면, 그들도 감명을 받지 말아야 하며, 앎이 미끼를 물지 않으면, 그들도 미끼를 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이 그들 내면에 있는 앎의 힘이다. 만약 앎이 평화로이 있으면, 그들도 평화로이 있을 수 있고, 앎이 어디에도 가지 않으면, 그들 역시 어디에도 갈 필요가 없다.

이것이 당신의 체험이 되고, 점차 더 당신의 체험이 되어 갈수록, 당신이 삶에서 체험하는 확실성이 더 커지고, 자신감이 더 커지며, 평정심이 더 커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모두 앎에서 오기 때문이다.

새 메시지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제공하는 다른 가르침들도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일단 그 길을 찾으면, 당신은 끝까지 가야 한다. 취미 삼아 하지 말라. 당신은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계속하기에는 너무 불확실할 때도 있을 것이며, 당신 마음이 다른 것들이나 다른 끌림에 흔들릴 때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연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앎으로 가는 계단을 시작하면, 당신은 계속해야 한다. 멈추지 말고, 끝까지 가라. 이것은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잠시 오르고 나서, “오, 이거 힘든데, 너무 경사가 급해. 이 산을 내가 꼭 올라야 하는 거야?” 당신은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본다. 하지만 당신은 계속 가야 한다.

앎의 힘과 현존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당신 내면에 산다. 앎을 발견하는 것이 당신 영성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것이 당신의 영적 일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큰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적의 일부이자, 이 목적을 표현할 수 있는 큰 관계들을 발견할 어떤 희망이라도 가지고자 한다면, 당신은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앎도 있고, 당신의 생각도 있다. 이 둘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 마음은 앎인 영을 섬기기로 되어 있다. 앎은 신을 섬기며, 당신 혼에 절실히 필요한 것과 세상에 온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니 길이 단순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라. 길은 복잡하지 않다. 여행에는 지혜와 재평가가 필요하지만, 복잡하지 않다. 당신 혼에 필요한 것은 본질적이다. 사람들, 장소들, 그 밖의 다른 것을 취하는 것으로 충족될 수 없다. 당신 혼은 더 큰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당신 내면에 있는 앎은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